Page 157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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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설립 첫 예배를 드리다
1949년 김해교회의 분규가 표면화되고 2년여 동안 권리를 장악하기 위한 심한 투쟁으
로, 예배 시에 한쪽에서 찬송공세, 기도공세를 하는가 하면 때로는 강단에서 끌어 내리고
예배 중에 서로 치고 패는 난투가 벌어져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세에 몰린
쪽은 부산에서 깡패까지 동원하는 등 많은 갈등으로 교인들은 점차 떠나기 시작하고 교회
는 쇠퇴해가니 하나님과 지역사회에 덕스럽지 못한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한 교회에서 이런 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수적
으로 우세한 고신 측은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척을 하
기로 하였다.
민영완 목사를 비롯한 고신 측은 1951년 10월 첫 주일
에 신문지 한 장씩을 가지고 김수로왕릉 서쪽 강변에 모이
기로 하였다. 9월 마지막 주일을 끝으로 교회 앞에 광고
교회설립에 대한 故 신봉도 장로의 메모
한마디 없이 그대로 빈손으로 나와 눈물로 예배를 드렸다.
1951년 10월 7일(첫 주일)에 신문지
한 장씩을 가지고 김수로왕릉 서쪽 강변
에 모이기로 했으나 하나님께서 새장소
로 인도하셔서 20년 된 15평 정도의 군
성각(群成閣)이라는 중화요리집 2층을 예
배처소로 구했다. 이 집은 김해읍 중앙통
인 서상동에 있었는데 비둘기 집이 되어
너무나 험하고 더러웠다. 집사 몇 사람이
와서 하루 종일 청소를 하고 갈대 자리
를 사다 깔았다. 그 날 교인 4-50명 정
교회설립 1주년 기념부흥회(중앙 이영수를 중심으로 좌측에 강사
도 올 것으로 예상했는데 모두 어찌 알 이약신 목사,
우측에 민영완 목사, 변증이 사모, 앞줄 좌측부터 김강환 집사,
고 왔는지 120명이 모였다. 한사람 건너 신봉도 집사, 장의상 집사)
마치 마가의 다락방에 120문도가 모인
것 같았다. 눈물로 감사와 영광을 주께 돌렸다. 반주자, 지휘자, 성가대가 다 나왔고, 풍금도
하나 생겼다. 주일마다 출석교인이 계속 늘어 앉을 자리가 없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
아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였다.
설립 첫 주일 예배의 설교와 사회는 민영완 목사, 성경 본문은 미상, 기도는 이영수(李領
首), 연보는 57,900환, 신봉도 외 1인의 특별헌금이 있었다. 수요밤예배에는 총 57명(남
20, 여 37)이 회집하였으며, 다음 주부터 구역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이어 11월 둘째
주일에는 133명으로 늘었고 집사를 재임명하였으며 부인 전도회가 조직되었다. 12월 첫
주일에는 성도의 최대 사명이 전도임을 강조하면서 배가전도를 독려하였고, 12월 둘째 주
일에는 학습(3명), 세례(5명) 및 첫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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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