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5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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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비유하자면, 군청에 쌀가마니를 공출할 때 관인이 찍
힌 가마니라야 그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다는 것과 같다.”라는 설교에 너무나 감명을
받고 그 즉석에서 예수 믿기로 작정했다고 한다. 그를 교회로 인도한 사람은 정순종 집사
인데, 부산 수정교회 원로목사인 정순행 목사의 형님이었다.
1935년 음력 섣달 그믐날, 처음 교회에 나가서 예배에 참석하였다. 찬송도 처음 해보
고, 설교도 생전 처음 들었다. 예배의식이 신기하고 새롭고 너무 좋고 마음에 들었다. 교회
가 무엇인지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처음 교회를 접하자마자 불붙는 마음이 생겼
다. 그 후 50년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이 길을 걸어왔다.
교회에 나가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고 바깥 세상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짐에 따라 공부
못한 것이 한이 되기 시작했다. 사업과 돈이 유혹도 했으나 하루를 살아도 바로 살고, 참
되게 살고, 의롭게 살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그것은 바로 목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후 부모의 허락도 없이 사업을 포기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어 동경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연수학관(硏修學館)에서 공부하다 고베의 간사이성서신학교에 입학했다. 힘든
신학수업을 하던 중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다시 고향에 일시 귀국하였으나 함양경
찰서 유치장에 갇힌 몸이 되었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943년 3월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첫 부임지 경주 인동교회
를 비롯, 함양 사근교회, 안의교회, 구포교회, 김해중앙교회 개척, 신마산교회, 서문교회 개
척, 강서교회를 개척하였다. 교단활동으로는 고려신학교 서울 유치에 대한 기초작업으로
고려신학교 서울분교를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민영완 목사가 서문교회에 시무
하는 동안 1966년에 고려신학교 서울분교설립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았다. 그
리고 그 후 1969년에 서울 고려신학교의 명칭이 바뀌면서 초대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민영완 목사는 총회교육부장으로 8년간(1967-1975) 봉사하면서 우리 교단의 숙원이었
던 주일학교 유년부 계단공과를 편찬하였다. 주일학교 공과(학생용 6권, 교사용 6권)을 편
찬하였다. 1975년에는 「어린이 새찬송가」를 만들게 되었는데 이때 본 교단 총회장에 피선
되었다. 그 후 17개 교단지도자들과 함께 찬송가 통일 작업을 하여 8년여 노력 끝에 「통
일 찬송가」가 나오게 되었다. 우리 교단도 이 찬송가에 대해 공동판권을 가지게 되고 그
수익의 일부도 가질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었던가!
민영완 목사는 목회를 시작한지 3년 만에 우리 교단으로서는 처음 미국 정통장로교 총
회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하였다. 그 후 우리 교단이 반고소파문제로 큰 혼란에 빠져
있을 때, 민영완 목사가 1974년에 교단 안에 설치된 특별재판국의 국장이 되어 이를 해결
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이후 3년간 수습위원장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그 후유증을 수습하는
데 많은 노력을 하였다.
2) 목회신념
민영완 목사의 목회생활 45년의 목회신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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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