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김해중앙교회
P. 153
혹자는 전성도 목사가 김해중앙교회를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성도 목사의 재
임 중에는 고신 측이 절대 다수로 예배당을 차지하고 있었고, 총회 측은 수적으로 열세여
서 개인가정의 사랑채에서 예배를 드렸다. 1950년 1월 18일에 예배당으로 돌아와 오전 9
시에서 10시까지 예배를 드렸는데, 고신 측은 11시에 예배를 드렸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고신 측이 분쟁에서 진다거나 따로 나가서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1950년 6월 10일에 민영완 목사가 부임한 후에야 이렇게 서로 싸우는 것은 교회에나 지
역사회에나 덕이 되지 않으니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따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1951년 10월 3일에 김해중앙교회가 설립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교회가 세워지고 10
월 7일 설립 첫 주일예배를 드렸으므로 김해중앙교회 초대담임목사는 민영완 목사로 보아
야 할 것이다.
3) 전성도 목사 약전(1911-1991)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다음해인 1911년 1월 17일 전성도 목사
는 경북 안동군 서후면 명동에서 전기석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
였다.
13세에 선교사 인노절에게서 세례를 받고 17세에 청운의 뜻을
품고 고향을 떠나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그해 11월 중
퇴하고 기독교 학교인 대구 계성학교에 들어가 1935년 3월 5일
25세에 계성학교를 졸업했다. 같은 해 4월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
경법정대학 고등사범부에 입학했으나 중퇴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전성도 목사
1935년 10월부터 이승규 장로(노산 이은상 선생 부친)가 세운 마
산 창신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39년 2월까지 근무하였다. 이근실 씨의 4녀인 이덕선 씨
와 결혼하여 마산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였다.
1939년 4월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신호에 있는 중앙신학교에 입학했으나 1941년 12
월 태평양전쟁으로 학교가 폐교되어 중퇴하였다.
한편 일본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을 때 일본 병고현 무고군 오오기교회 전도사로 2년
3개월간 시무한 후 귀국하여 1942년 4월부터 1944년 10월까지 경남 거창읍교회 전도사
로 시무하면서 서울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편입하여 1943년 12월 3일 신학교를 졸업했다.
1944년 11월 15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시무하고 있던
거창읍교회에서 위임목사가 되어 1947년 10월까지 그 교회를 섬겼다. 그 후 김해읍교회
를 2년 5개월간 담임목사로 섬긴 다음, 1950년 3월 마산 창신중학교 제6대 교장 겸 교목
으로 부임, 1년 4개월간 봉직하였다. 그곳에서 6.25 동란을 만나 가족은 부산에 두고 학교
에서 혼자 기거하면서 학교를 지켰다.
그 후 전성도 목사는 의령교회, 진주성남교회, 부민교회를 거쳐 제일신마산교회에서 담
임목사로 8년 5개월간 시무한 다음 온천교회에서 15년을 봉직한 후 정년은퇴하였다. 재임
153
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