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1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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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노회는 총회와 결별하고 말았다.
한국교회, 특히 경남노회가 자리한 부산, 경남의 교회들은 총회측을 지지하는 측과 고신
측을 지지하는 측으로 나뉘어지게 되고 우리 김해읍중앙교회도 이때 분리하여 교회가 형
성되었다. 교회가 분립 개척될 때까지는 많은 진통과 갈등이 있었고, 다수의 교인들이 모
든 기득권을 버리고 맨손으로 나올 때에는 개척자의 정신과 모든 것을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기고 아브라함처럼 「주실 땅」을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민영완 목사를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은 동란 중의 혼돈과 어려움 가운데서도 연보를 하여 목조 예배당을 건축하고
김해 굴지의 교회로 성장해 가는 초석을 놓았던 것이다.
성도들은 어려움을 겪는 교우들에게 도착한 구제품을 나누어 주고, 분리 개척한 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자 1952년 1월 1일부터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를 열었으며, 4월 6일부터
고난주간을 지키고, 성찬식을 거행하였다. 4월 13일 주일에 동광국민학교에서 부활절 연
합예배를 드렸다. 이날 부활주일 아침에 모든 성도가 금식하여 헌금토록 하였다. 5월 첫
주일에는 야외예배를 드렸으며, 구역예배는 농번기 동안에는 쉬고 새벽기도에 열심을 다하
도록 독려하였다.
1952년 7월 27일 주일에는 157명이 회집하였고, 8월 10일에는 하기 아동성경학교를
개교하였다. 주일학교 교사가 부족하여 제직들에게 교사로 지원해 주기를 간곡히 부탁하는
광고도 게재하였다.
2. 김해중앙교회 태동과 전성도(全性道) 목사
1) 고려파와 총회파
1938년 9월 10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회집된 장로교 제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하
기로 가결한 이후, 신사참배는 국가의식이지 우상숭배가 아니며 총회가 신사 참배를 하도
록 가결했으니, 이를 따라야 한다는 ‘신사참배 찬성파’와 신사참배는 일본의 천조대신(天照
大神)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는 명백한 우상숭배이므로 어떤 고난을 당해도 이를 따를 수
없다는 ‘수진수난(守眞受難) 성도’로 나뉘어 있었다. 그 후 총회를 지지하는 측은 ‘총회파’
로 출옥성도 중심 수진수난성도들은 ‘고려파’로 주종을 나뉜 경남노회는 고려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1947년 4월 19일(장로교) 제35회 총회는 각 노회가 고려신학교와 관계 맺는 것을 금하
고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노회를 3개 노회, 즉 경남(부산 지방), 경서(진주, 거창), 경
중(마산, 통영) 노회로 나누자 경남노회는 그 부당성에 문제를 제기하며 총회에 격렬히 반
발하였다. 이에 총회는 전권위원을 선정하여 심사 처리키로 결의함으로서 경남노회 분쟁에
총회전권위원회가 개입하게 되고, 경남노회는 결과적으로 일제시대의 우상숭배와 자유주
의신학(신신학)에 대한 견해차로 5개 노회로 나뉘게 되었다. 즉,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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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