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7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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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측의 노회장이 경북노회를 국제기독교연합회(ICCC)로 끌
고가려고 한다면서 고신 측이 심한 반발을 하자 노회장 직권으로
고신측 인사들의 총대권을 박탈한 뒤 총대를 보선하여 총회에 보
고하자 고신 측 인사들은 또 하나의 노회를 조직하여 총회에 총대
보고를 함으로써 3갈래 총대명단이 총회에 접수되게 된 것이었다.
또 하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신학교 합동안이었다. 고려신학교
를 서울장로회 총회신학교와 합동하되 연내로 폐쇄하고 서울로
올라가기로 가결하자, 마산노회에서는 교단의 뿌리이자 요람인 고
한상동 목사
려신학교를 지키기 위하여 임시노회를 열고 제46회 총회결의를
불법으로 규정하였고, 한상동 목사는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을 하기에 이르렀다. 고려신학
교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움직임은 1963년 6월에 나타났다. 총회 강도사 고시에 응시한 고
려신학교 졸업생 5명에게 응시자격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제2영도교회 분쟁이 연이어 터지면서 부산노회소속 교역자들이 고신 부산노회 환
원을 추진하여 ‘노회환원취지문’을 발표하였다. 부산노회가 환원하자 전라노회도 환원하였
고 전국적으로 환원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목사 32명, 장로 29명이 참석한 가운데
1963년 9월 17일부터 20일까지 환원총회를 부산남교회에서 소집하고, “합동하게 된 것은
하나님 앞에, 교회 앞에 잘못이다”며 한상동, 황철도 목사 등 합동추진위원들이 사과하기
에 이르렀다. 모든 목사와 장로는 1963년 9월 23일부터 29일까지 일주일간 합동에 대한
잘못을 자숙하기로 가결하였다. 합동할 당시 600여 교회였으나 445개 교회로 줄었으며
노회는 7개 노회(부산, 경남, 경북, 전라, 진주, 경동), 124개 교회, 116명의 목사로 파악
되었다 이 합동이 실패한 이유는, “교권주의, 권모술수, 약속위반, 배신, 생활순결에 대한
견해차, 인간적 연약성 등 많다. 그러나 주원인은 합동 그 자체에 대한 신학적, 역사적 검
토가 없었고 과거사 청산이 없었고, 조급하게 단지 합동 그 자체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과거사에 대한 명백한 참회고백과 역사정리가 없이 하나됨 그 자체만을 덕목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14)
7. 재단분규로 인한 교단분열
학교법인의 설립과 고려신학교의 고려신학대학 인가 과정에서 한상동 목사 측과 송상석
목사 측의 재단분규가 교단분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총회유지재단 이사장이던 송상
석 목사 측과 한상동 목사 측의 알력은 총회재산문제로 법정소송까지 하게 되고, 교회문제
를 세상법정에 소송을 한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의 문제로 교단분리까지 간 것이었다.
1972년 9월 21일 제22회 총회 시 고려학원 이사장 송상석 목사의 임기가 만료되어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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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