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5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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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남(법통)노회


                  예장 총회로부터 대한기독교장로회(기장)가 분리해 나오기 전에,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던
                자들이  교권을  쥐고  있던  총회는  고려신학교  설립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먼저 1946년 12월 3일 진주에서 회집된 제48회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일제치하의 교
                권주의자인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에  선출되고  그의  추종자들이  노회의  주도권을  잡게  되
                자,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와 함께 학생 추천도 취소할 것을 결의하고 말았다. 이에 한상동
                목사는 노회 탈퇴를 선언했고 노회 소속 교회 중 67개 교회가 이에 동조하여 항의 성명을
                발표하는 등 실력행사에 돌입하여 팽팽하게 맞섰다. 이에 당황한 노회장 김길창 목사 등은
                1947년  3월  10일  구포에서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반대자들을  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노회장 김길창 목사 이하 전 임원이 총사퇴하고 신사참배에 대한
                범조(犯助) 인정을 통회하는 한편, 진주에서 열렸던 노회 결정을 번복시켰다. 이러한 전 임
                원  총사퇴와  번복  결정은  평신도  운동의  거센  저항과  투쟁의  승리였던  것이다.                  12)   또한
                1948년  4월  20일  제34차  총회에서는  전남노회가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추천해도  좋으
                냐?”는  질의에  “고려신학교는  우리  총회와  아무  관계가  없으니  노회가  추천할  필요가  없
                다”고  말하고  동년  9월  21일  경남노회  제49회  임시노회에서도  고려신학교  인준  반대  결
                의를 하게 되었다. 1949년 4월 19일 제35회 총회에서도 지난해 총회의 결정을 재확인하
                여  분열조짐을  보이기  시작하다가  1951년  5월  부산중앙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본래  정
                통노회인 경남(법통)노회가 파송한 총대들을 경찰력으로 총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제지하고
                신사참배 참여세력이 주축이 되어 만든 불법 노회인 또 다른 이름의 “경남노회”를 받아들
                임으로써  결과적으로  고신은  교권자들의  횡포로  한국장로교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남(법통)노회는 1952년 4월 29일 대구서문교회에서 열린 제37회 총회에까지
                대표자를 보내 재고를 요청했으나 “고려신학교 및 그 관계단체와 총회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못을  박자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완전  결별하고  말았다.
                장로교 1차 분열을 가져온 이 일련의 과정에서 볼 때 고신이 자의적으로 분열해 나간 것이
                아니고  총회  내의  교권주의자들이  축출함으로  일어난  어쩔  수  없는  분열이었음을  최덕성
                교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고신파는 1945년부터 총회에 의해 제거되어 불가피하게 독립교단으로 출범한 1952년까지 친일파 인사들과 함께
                  단일  장로교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교회분열  방지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총회가  자신들을  제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진 후에도 두 해 가까이 독자적인 교단설립을 하지 않고 일치를 모색했다. 제거당한 후에도 이약신 목사(경남
                  노회장)와 엄주신 장로를 포함한 사절단을 이듬해 총회(1952)에 파송해 분열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  단체와  하등의  관계가  없다’고  재천명함으로써  고신  분열을  고착시켰다.” 13)




                12)   50년사  135페이지  참조
                13)   50년사  136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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