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3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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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신학교  설립


                  남한 출신 출옥성도 중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목사 등은 교회개혁과 재건은 올바른 신
                학교육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인식을  같이하고  신학교  설립을  의논했다.  이는
                1940년  4월에  설립된  조선신학교(현,  한국신학대학)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였다.
                  1938년 9월에 신사참배 거부로 평양신학교가 문을 닫자 서울 승동교회에 조선신학원이
                문을 열었다. 이 신학교의 김재준 교수는 한국 교회의 정통신앙을 비판하는 진보주의신학,
                자유주의신학,  신신학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신사참배  반대운동도  비판한다.
                                                       “김재준의  논리에  따르면  주기철을  포함한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들의  순교와  수진수난
                                                       (守眞受難)은  쓸모없는  것이다.  불나비가  불
                                                       을  향해  달려드는  것과  같이  순교를  한답시
                                                       고  종교적  영웅심을  발휘한  것이며,  쓸모없
                                                       는 종교적 계율준수에 일념하여 너도나도 맹
                                                       목적으로  일제에  항거한  것이다.”        8)
                제1회  진해  신학강좌  기념                        출옥 성도들은 이런 사상을 가진 자들에게
                (고려신학의  전신이  됨)
                                                       신학교육을  맡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평양
                산정현교회에 시무하던 한상동 목사가 모친 별세소식을 듣고 부산으로 귀향하면서 고려신
                학교 설립 안이 구체화되었다. 평양신학교의 정신을 잇는 정통 신학교를 세워 바른 신학정
                립과 아울러 신실한 교역자 양성을 통한 전도운동을 전개하려 하였다. 한상동 목사는 고려
                신학교  설립  동기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출옥 이후 이북에서 교회를 섬기다가 남한에 와서 보니 신학교라 있기는 하지만 모두가 일본시대 일본의 기독교를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 주동이 되어 신학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은 성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임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의  주인이  되어  신학교육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교회를
                  저들의  손에  맡길  수  없다는  결론뿐이었습니다.” 9)


                  1946년 5월 신학교 설립을 위해 한상동, 주남선, 박윤선 등 여러 목사로 기성회를 조직
                하였다.
                  동년  6월  23일  경남노회는  진해에서  신학교  설립을  위한  하기  신학강좌를  개최하고  7
                월  9일  임시노회를  소집하고  옥중  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려는  신학교에  학생  추천
                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경남노회 인준을 받고 1946년 9월 20일 지금의 금성중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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