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9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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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고신교단의 성립
1. 신사참배 가결
조선을 강점해 온 일본은 1905년 11월 이른
바 ‘을사보호조약’을 강제 체결하면서부터 ‘식민
지 조선 찬탈’을 노골적으로 획책하기 시작하였
1)
다. 이때 조선은 구미 열강의 양해와 묵인 및
후원 하에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공식적으로 식
민지 지배정책에 희생되기 시작했다. 일본은 조
선을 발판으로 만주, 중국, 동남아시아 전역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서는 조선을 일본식 군국주
체포당해 끌려가는 우리 애국청년들을 냉소하고 있는 의화한다는 방침 아래 내선일체(內鮮一體 - 일본
일본의 군중들
인과 조선인은 하나) 정책을 펴게 되었다. 즉,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하게 했으며, 군국주의 정신적 단
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우리나라 전역에 일본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모셔놓은 신사 앞에
축절일(祝節日) 때마다 도열하여 최고의 경례를 하게 하고, 아침에는 일본 천황의 궁이 있
는 동쪽을 향하여 합장하여 절을 하는 궁성요배(宮城寢拜)를 강요하였다. 이것은 민족말살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에 대해 교회는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며 신사참배를
반대하였으며, 주한선교사들도 이런 “예배” 행위는 기독교의 교의에 근본적으로 어긋나므
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진정서를 내었
으나 일제는 여기에 맞서 신사참배를 하지 않
는 자는 검속(檢束)하고 학교는 폐교시키고 선
교사는 추방시킨다는 강경책을 들고 나왔다. 일
제의 눈에는 한국교회가 걸림돌이었다. 한말(韓
末)의 암흑기를 지나 개화기를 거쳐 오는 동안
에 나약한 조선을 정신적으로 이끌 수 있는 것
은 기독교와 교회뿐이었다.
3.1운동에 교회가 대대적으로 참여했으며 많
3.1 사건으로 체포된 성도들을 서울 근교에서
은 지사들과 독립투사들이 교회에 몸담고 있었 십자가형 집행하고 있는 광경
1) 50년사 123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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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