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0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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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주한 선교사들이 건재해 있었으며 그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민중의 지팡이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와 교회를 그냥 두고서는 그들의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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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달성될 수 없었다.
차츰 압력을 가해 오던 일제는 1938년 9월 9일 장로회 제27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
에서 열렸을 때 회의장에 97명의 경관을 참석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는 한편, 교회 내
친일파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인사들의 솔선수범 하에서 회장 홍택기, 부회장 김길창 등이
주동이 되어 신사참배는 종교행위가 아니며 기독교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결의문 채
택과 더불어 신사참배를 가결하였다. 3)
“아등(我等)은 신사(神社)가 종교(宗敎)가 아니오 기독교(基督敎)의 교리(敎理)에 위반(違反)되지 않는 본의(本意)를 이
해(理解)하고, 신사참배(神社參拜)가 애국적(愛國的) 국가의식(國家儀式)임을 자각伯覺)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神社參
拜)를 솔선여행(率先勵行)하고 나아가 국민정신(國民精神) 총동원(總動員)에 참가(參加)하여 비상시국하(非常時局下)
에서 총후(銃後)의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 적성(赤誠)을 다하기를 기(期)함” 4)
총회를 마친 후 각 노회장이 평양신사에 참배를 함으로써 개신교 각 교파와 천주교가
신사참배를 하기로 허용하였으나 한국교회의 마지막 보루로 남아있던 조선예수교 장로회
마저 굴복하여 신앙의 순결을 잃고 역사에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뒤 일부 교역자들은 한강에서,
부산의 일부 교역자들은 송도 앞바다에서 일본 귀신 천조대신(天照大神)의 이름으로 침례
를 받기도 하고 교회헌금을 일제 전투기제조 헌납금으로 바치는가 하면 교회의 종을 떼어
다가 일본군에 헌납하고, 일제 신주를 교회 경내에 모셔놓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는 백귀
난행(百鬼亂行)을 자행하기도 한 사실이다. 홍택기, 김길창을 비롯한 교회 내 친일세력들은
신사참배 가결안을 통과시킨 후,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역자들을 노회에서 제적시켜 내쫓
았으며 “동료 목회자를 위협하고, 왜경에게 고발하고, 강단을 빼앗고, 파면하고, 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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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으며 이들 가족을 교회사택에서 내어 쫓는 등” 친일행각을 일삼았다.
대동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일제의 난동은 극에 달해 1944년에는 각지의 교
회당을 군용으로 징발하고, 근본적인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4복음서를 제외한 성경 중 출
애굽기, 요한계시록, 예언서를 비롯한 구약성경 대부분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찬송가 가
사까지도 고치거나 먹칠을 하도록 했다. 드디어 1945년 7월 19일에는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이라는 어용교단을 만들어 조선의 개신교 각 교파를 강제 통합하여 예속시키고, 일제
의 시책에 순응하는 사람들만이 교회를 지도하도록 하였다.
2) 50년사 124페이지 참조
3) 50년사 124페이지 참조
4) 50년사 125페이지 참조
5) 50년사 125페이지 참조
140 김해중앙교회 70년사(은혜와 축복으로 달려온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