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4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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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부산일신여학교 교실 한 칸을
빌려 고려신학교를 개교했다. 만
주 동북신학교 박형룡 박사를 교
장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나 박 박
사의 귀국 지연으로 말미암아 박
윤선 목사가 임시교장을 맡아 역
사적인 고려신학교를 개교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주에서 모인 제48회 고려신학교 교장 및 교수 취임식
경남노회 정기노회에서 일제시대
교권주의자인 김길창 목사가 노회장에 당선되고, 그의 추종자들이 노회의 실권을 쥐게 되
자, 고려신학교 인정 취소와 함께 학생 추천도 금하는 결정을 하였다. 이에 한상동 목사는
노회 탈퇴를 선언하고 노회 소속 67개 교회가 이에 동조하여 항의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실력 행사에 돌입하였다. 이에 당황한 이들은 1947년 3월 10일 구포에서 임시노회를 소
집하여 노회장 김길창 이하 전 임원이 사퇴하고 신사참배에 대해 통회하는 한편, 진주노회
결정을 번복시켰다. 후에 박형룡 박사가 1947년 10월 14일에 고려신학교장에 취임하였으
나 교회진로에 대해 한상동 목사와 의견 차이로 말미암아 7개월 만에 사임하고 서울에 올
라가 장로회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한편 신사참배〔거부〕 문제로 〔본국으로〕 강제송환 되었던 선교사들이 다시 한국을 찾기 시
작하였는데, 그 중에 〔미국〕 정통장로교회소속의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와 옛 평양
신학교 변증학 교수 해밀톤(Hamilton), 그리고 성경장로교회에 속해 있던 최의손, 마두원 목
사들도 고려신학교에 합류하였다. 10)
한부선 선교사는 소위 메이첸파 선교사로, 이 ‘메이첸파’란 미
국 북장로교회가 신학적으로 좌경화할 무렵, 그레샴 메이첸 교수
를 중심으로 분열하여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우고 정통장로교
회를 구성한 그룹이다. 11)
후에 고신을 공격하는 측에서 고신 운동을 메이첸파와 연계시
키는 것은 ‘분열’에 초점을 맞추기 위함인데 정통 신앙을 고수하
는 이들 선교사들이 ‘신앙의 정통성’을 표방하여 설립한 고려신학
교에 관심을 갖고 참여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겠다.
한부선 선교사
10) 50년사 132페이지 참조
11) 50년사 132페이지 참조
144 김해중앙교회 70년사(은혜와 축복으로 달려온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