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0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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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바른 신앙노선을 지키기 위한 교회설립(1951-1953)
1. 시대개관
1950년 4월 경남노회는 출옥성도들을 거북스럽게 여기는 친일 목사들의 세력이 점차
확산되고 고려신학교 추천서 문제를 반대하여 오다 경남노회는 5개가 되었다. 장로회 제3
회 총회는 경남노회 총대 문제로 개회 벽두부터 소란이 일다가 급기야는 경찰이 동원되어
진압되고 총회는 유회되었다. 그리고 2개월 후에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공산군은 수도 서울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38도선 전역을 일제히
넘어서 불의의 공격을 가하여 남침하여 왔다. 병력과 장비가 열세였던 국군은 이 불의의 침공을 끝내 방어할 수 없
어 후퇴 남하하게 되고, 정부는 물론 수많은 서울시민들도 남쪽으로 피난을 하였다.
국군은 낙동강 선을 마지막 방어선으로 저항을 계속하고, 유엔은 즉시로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공산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철퇴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군사적으로 원조할 것을 결정하여 유엔군을 한국에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리하
여 미국(美) 영국(英) 프랑스(佛) 캐나다(加) 호주(濠) 필리핀(比) 터키(土) 등 16개국의 군대와 한국군은 유엔군사령
부 지휘 하에 작전을 펴게 되었다. 이 동란으로 말미암아 입은 인명 및 재산의 피해는 막심한 것이었다. 남한의 인
명피해만도 사망자가 15만 명, 부상자가 25만 명에 이르렀고, 공산군에 납치되어 간 자가 10만 이상이었으며 행방
불명된 자가 20만 명에 이르렀다. 그 위에 전재민(戰災民)의 수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공산군이 받은 피해는 그보
다도 훨씬 더 많았다.” 16)
“6.25 전란을 겪으면서 받은 국민적 손실은 너무나 컸다. 그러나 기독교회가 받은 비극의 깊이는 엄청났다. 손양
원 목사, 김익두 목사의 순교를 비롯하여 많은 목사와 신학자들이 납치되어 행방이 묘연하였다. 이 사변을 통해 파
손, 손실된 교회의 수는 장로교가 152개 교회, 감리교가 84개 교회, 성결교가 27개 교회, 구세군이 4개 교회, 기타
교파에도 그 손해는 막심했다. 순교, 납치당한 이는 장로교 177명, 감리교 44명, 성결교 11명이었다. 그러나 이 통
계는 교회가 그 뿌리에서부터 받은 아픔과 고난을 표명할 수는 없었다. 전북 옥구군 원당교회에서는 75명의 교인
중 73명이 학살당하였다.
한국교회는 1.4 후퇴 때 부산에 몰려와서 하나님의 심판을 역사 안에서 보고, 거국적인 기도회를 열어 주의 손길
을 더듬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는 신교 각파의 연합체인 ‘기독교연합 전시(戰時)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미
국대통령과 유엔사무총장에게 각각 메시지를 발송하며,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했다.” 17)
1951년 5월 25일에 제36회 총회가 속개되었으나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경남(법통)노
회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와 관계없는 것으로 선포되었다. 1952년 4
월 29일 제37회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그 관계자들은 총회와 하등 관계없다는 총회 측의
재언명과 경남(법통)노회 엄주신 장로의 고별선언을 최후로 고려신학교를 중심한 경남(법
16) 50년사 145페이지 참조
17) 50년사 146페이지 참조
150 김해중앙교회 70년사(은혜와 축복으로 달려온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