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2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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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법통〕노회, 장로회신학교를 지지하는 중간노회,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는 3분(三分) 노
회 등 5개 노회로 나뉘어졌다.
1950년 제36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열렸으나 5분된 경남노회가 각기 다른 총대
를 파송하였기 때문에 개회 벽두부터 어느 쪽의 총대를 받아들일 것인가로 논쟁이 벌어지
게 되고, 총대자격에 대한 논쟁은 마침내 총회 장내에 소란을 야기시켜 유회되고 말았다.
1951년 5월 25일 부산중앙교회에서 속개된 제36회 속회총회에서는 원래의 경남노회인
경남〔법통〕노회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비고신측의 불법총대를 받아들이기로 가결함으로서
경남〔법통〕노회는 총회에서 축출당하고 말았다.
총회가 이렇게 분열되자 전국의 지교회(支敎會)도 총회를 지지하는 총회 측과 경남〔법
통〕노회를 지지하는 고신 측으로 양분되어 분열의 아픔을 맛보게 되었다. 김해교회 문제도
이러한 교계적(敎界的) 분쟁을 배경으로 양측으로 나뉘어져 2년여 간 갈등을 겪게 되었다.
2) 김해중앙교회의 태동과 전성도 목사
전성도 목사는 1947년 9월 김해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의 교계는 총회파와 고려파로
나뉘어져 갈등을 겪던 때였으므로 김해교회도 예외일 수 없었다. 김해교회의 총회 지지 측
은 장로를 중심한 소수였고, 고신 측을 지지하는 측은 집사들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교인
들이었는데, 1949년에 분규가 표면화되었다.
당시 쌍방의 적대감은 다음의 한 구절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노회 안에 고려파라는
이교파가 있다. 그 파가 각 교회를 요란케 하고, 한부선이가 선전하는 메첸교를 만들려는
이교적 사상이 발동하고, 특히 교회당을 쟁탈하려 한다.” 18)
여기서 김해교회의 총회 지지 측은 고려파를 이교파(異敎派) 또는 메첸파라고 폄하하였
는데 메첸파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당회장 전성도 목사는 고려파를 지
지하였다.
1949년 6월 25일에 경남노회〔법통인 아닌 또 다른 이름의〕 전권위원회가 전성도 목사
에 대하여 무기정직 처분을 내린 후 1949년 8월 21일 전성도 목사가 고신 측 지지를 선
언하였고 총회측의 담임목사는 따로 부임하게 되었다. 전성도 목사는 김해를 떠날 때까지
고신 측 성도들을 목회하였으니 당시 김해교회는 한 예배당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두
교회로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전성도 목사는 1950년 3월에 교회를 사임하고 마산 창신중학교 교장으로 가게 되었다.
고려파 집사들이 전성도 목사가 김해에 남아서 목회를 계속해주기를 간청하였으나 이를
끝내 뿌리치고 김해를 떠난 것은 그동안의 교회분규로 말미암아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고,
너무나 온유하고 곧은 그의 성격 때문에 김해에 남아 있는 것은 덕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
으로 볼 수 있다.
18) 50년사 148페이지 참조
152 김해중앙교회 70년사(은혜와 축복으로 달려온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