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0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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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될 것 같았다. 나는 그 때 이제 그만 사면할 때가 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22)
그 후 이성옥 목사가 부임하여 그 의자를 팔아 없애고 마루를 놓았다가 그 후 다시 의자
를 놓았으며, 그 후에 피난민이 다 돌아가도 교회는 200여 명이 모이는 큰 교회가 되어 있
었다.
6. 초대 개척자들(신봉도, 김강환, 장의상 집사)
1938년에 김해읍교회에서도 신사참배문제로 시
련을 겪었고 1946년에 교회와 노회에서 교회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신사참배를 한 것이 십계명의 제2계
명에 저촉이 된다는 주장과 저촉이 안 된다는 양론
이 격렬, 이 문제로 양파가 갈라서게 되었다. 김해읍
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신사참배는 죄가 되지 않
는다고 할 때 신봉도 집사는 혼자서 하나님의 계명
을 이해 못하는 교인들에게 신사참배는 엄연히 불법
이라고 역설, 반대하기 시작했다. 목사 이하 전청년
완성된 교회 배경으로 변증이 사모(왼쪽)와 들이 신사참배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속에
박금란 여전도사
서 신집사 혼자 반대를 하니 눈물과 핍박이 계속되
어, 그 고초는 말하기 어려운 고통의 나날이었다. 그해 6월에 신사참배가 하나님 앞에 잘
못인 줄 알고 신봉도 집사에게 동조하는 교인 6명(구상업, 장의상, 박음전, 장지순, 정영
애, 김수봉)이 생겼다. 부산에서 온 김강환 집사가 동조하였고, 1948년에 전성도 목사가
부임하여 신사참배는 잘못이라고 하자 그 후 여집사들과 청년들뿐 아니라 교회에서 중임
을 맡은 분들이 동조하니, 신사참배가 죄가 안 된다는 교인 30여 명이 김해읍 동상동 2구
교인의 민가(民家)로 갈라져 나갔다. 1949년 8월 21일 당회장 전성도 목사 주재 하에 공
동의회를 소집하고 갈라져 나간 교인들의 출교 및 파직을 결정하였다.
신봉도 집사 김강환 집사 장의상 집사
22) 50년사 157페이지 참조
160 김해중앙교회 70년사(은혜와 축복으로 달려온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