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64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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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교회의 안정적 성장과 교회 부흥(1954-1977)
1. 시대 개관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중립국 감시위원단이 내주(來註)하게 되었다.
대한민국정부의 각 기관은 전란중의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하였다.
3년 동안의 전쟁에서 국토가 초토화되고 100만 명의 이산가족이 생겨났으며, 산업시설
은 거의 반이 파괴되어 마비상태에 빠지고, 도로와 건물의 파괴 소실도 막대한 수에 이르
렀다. 수많은 피난민이 남으로 내려와 우리 교회에도 한 때는 300여명의 피난민이 교회에
몰려와서 함께 숙식하며 어려운 때를 보내기도 하였다.
당시 피난민 중에는 교인들이 많아 교회가 양적으로 성장되기도 하였으나, 전쟁이 끝나
고 피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자 교회는 다소 성장이 멈추는 것 같기도 하였다.
특히 우리 교회에 김해 공병학교 군인들이 많이 출석하였다. 1954년 6월 20일 주일에는
36명의 군인들이 출석할 정도였다.
우리 교회는 이들 군인들에게 상당한 배려와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라
할 만큼, 의자를 놓아 군인들이 신발을 신은 채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했으며, 부활절에 계
란을 수집하여 공병학교 의무대에 보내었고, 공병학교 군인교회 설립예배에 축하 찬양단을
보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군인교회 유년주일학교를 위해 찬송 지도교사를 파견하기도
하였다.
1954년 8월 12일 오전 11시에 제1 예배당 헌당예배를 드렸다. 착공한 지 2년 3개월
만이었다(주례: 오종덕 목사, 설교: 한상동 목사). 건축비로 820,000환이 소요되었고 47평
의 목조 건물이었다. 우리 교회에 6년 4개월을 시무하던 이성옥 목사가 1960년 5월 31일
에 제2문창교회로 이임하고 6월 12일에 박태수 목사가 후임으로 부임하였다.
1960년대는 사회적, 정치적 대변혁기였다. 1960년에 4.19혁명이, 1961년에는 5.16군
사혁명이 일어났다. 1960년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도 불구하고 한국 교회는 기독교인
이었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자유당 정권을 지지하는 시대착오적 우
를 범하기도 하였으나, 5.16군사혁명이 일어나자 군사정권에 정면으로 대결하여 군사정부
의 정권이양을 강력히 요구하며 민중운동으로 3선 개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특유의 추진력으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1972)을 수립하여 고속도로 등 사회기반시설 확충과 각 지역에 공단을
조성하고 한일협정 조인, 월남파병을 통한 외화획득 등으로 하루가 다르게 경제는 부흥되
어 갔으나 경제 제일주의 풍조가 사회전반에 팽배하였다.
164 김해중앙교회 70년사(은혜와 축복으로 달려온 7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