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1 - 김해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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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금보극장 건축 반대
1961년 1월 24일 제직회에서 예배당 주변에 극장을 건축하려는 데 대하여 반대하느냐,
아니면 조건부로 양보하느냐 토론이 있은 후 조건부로 양보하기로 가결하였다.
양보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옥외 확성기 설치를 반대한다. 둘째, 교회 사택을 극
장 측에 매도하되 가격은 2,500,000환을 요구하기로 한다. 이 조건에 합의하지 않으면 반
대하기로 하였다.
이성옥 목사가 거주하던 사택이 극장 부근에 있었는데 이 사택에 예배당을 신축할 계획
이었으나 극장이 세워지면 예배당을 지을 수 없기 때문에 사택을 극장측에 팔려고 하였던
것이다. 교섭 위원으로는 신봉도 집사, 김강환 집사, 장의상 집사였다. 그러나 극장측이 이
조건에 응하지 않으므로 앞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타협치 않기로 했으며, 노회에 진정서를
제출하고 노회에서는 도지사에게 진정서를 제출토록 결의하였다. 3월 6일 김강환, 장의상,
우재순 세 사람이 경남도의 국, 과장을 만나 호소하기로 하였으나 이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극장은 건축되었다.
이 과정에서 교섭 비용 300,000환이 지출되었으며 비용은 제직원들(박태수, 김강환, 신
봉도, 장의상, 유남순, 김순덕, 신일선, 김인식, 이인수, 강소수)이 부담하였다.
9. 고신(高神)과 환원총회 지지선언
경남(법통)노회를 축출한 장로회 총회는 53년 조선신학교 측과 분열하였다. 이 총회는
1959년 다시 큰 분열을 겪게 된다. 일찍부터 이들 내부에 심각한 분열현상이 자리잡아 온
것이다. 이들은 여러 해 동안 세계기독교협의회(WCC) 계열과 복음주의 계열(NAE)로 내
분돼 다투던 중 대전에서 모인 총회에서 분열하게 되었다.
당시 WCC를 따르는 측(통합)은 그대로 남고, 반대하는 측(승동)이 고신과 합동할 의사
를 표시했다. 그들은 원 총회에서 분리해 나오는 명분을 찾기 위해서 고신파와 합동을 주
장했다. 합동추진위가 양쪽에서 발족돼 계속 접촉하며 의견을 좁혀 오다가 1960년 12월
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전격적인 합동 총회가 열리게 됐다. 합동은 쉽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신학교 문제로 난관에 부딪혔다. 고려신학교를 명칭도 없애고, 총회 분교로 운영
했던 것이다. 고신파 지도자들은 고신파의 정신이 완전히 질식하기 전에 고려파 교회를 구
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고려신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인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 복교선
언’을 했다. 여러 지역의 노회들이 속속 복귀하여 1963년 9월 17일 부산남교회에서 대한
예수교장로회(고신) 환원 총회로 모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24)
24) 50년사 173페이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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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편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온 50년의 발자취